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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보따리 - 책/어우야담

어우야담 / (237) 정려문의 허실

돈달원 2021. 2. 1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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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의 한 무사는 그의 별장이 밀성에 있어서 상주와 성주 사이를 왕래할 때에는 항상 그와 사이가 좋았던 유생을 찾아가 그 집에 머물렀다. 4, 5년 동안 경성에 있는 집안일 때문에 겨를이 없어 별장에 가 보지 못하다가 만력 10(1582)년에야 다시 밀성에 내려갔다. 가는 길에 상주와 성주 사이에 살고 있던 친구를 찾아갔더니 그 친구가 죽은 지 이미 3년이나 지나 있었다. 날은 이미 저물고 달리 갈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친구 집에 행장을 풀어 놓고 잠시 쉬었더니 친구의 아내가 안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곡성을 더욱 슬프게 하면서 종에게 명하여 손님방을 치우게 하고 무사를 그곳에 거처시켰다. 무사는 옛 친구 생각에 마음이 아파 밤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손님방의 북쪽 담장은 몹시 높았고 섬돌 위로는 빽빽한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달빛이 은은히 비치는데 대나무 사이를 느릿느릿 걷는 소리가 들려 혹시 호랑이나 표범 아니면 너구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몸을 숨기고 가만히 바라보니, 중이 어지럽게 자란 대나무 숲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사방을 둘러 보더니, 이윽고 몸을 빼내어 곧장 규방 안을 향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무사가 살금살금 걸어가 규방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구멍을 뚫고 엿보니 나이 젊은 부녀자가 엷게 화장하고 요염하게 앉아 청동화로에 불을 피워 소고기를 굽고 술을 데워 중을 먹이고 있었다. 중이 음식을 다 먹고 난 뒤 둘은 등잔 불빛 아래서 마음껏 음란한 짓을 벌이는 것이었다. 무사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화살을 꺼내 활을 잔뜩 당겨 창 틈새로 중을 향해 쏘니 중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죽었다. 무사는 활을 숨기고 손님방으로 돌아와 거짓으로 코 고는 소리까지 내며 잠자는 체하였다. 한참 있으니 안에서 부인이 높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집안 노비들이 놀라 사방에서 소리치는 바람에 집안이 온통 떠들썩하였다. 무사가 놀라 일어나 까닭을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인집은 양반입니다. 과부가 혼자 거처하는데 간밤에 미친 중놈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멧돼지처럼 달려들었으므로 과부가 칼을 빼어 중을 죽이고 그놈의 몸을 난자한 뒤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몸을 훼손시키고 자살하려 한 까닭에 온 집안 사람들이 애써 자살하지 못하도록 말렸습니다."

 

  무사는 냉소를 감춘 채 탄성을 발하고는 행장을 꾸려 그 집을 떠났다. 이듬해에 무사가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그 집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집에는 이미 정려문이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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