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향해 던져라, 달에라도 떨어질테니
블로그 애서(愛書)

이야기보따리 - 책/조선기담

조선기담 / 용산에 버려진 두 발 잘린 아이

돈달원 2021. 5. 10. 07:39
반응형

  중종 28년 2월 16일. 아직 겨울바람이 차고 바람이 쌩쌩 불던 겨울이었다. 용산강, 그러니까 지금 용산에 있던 어느 무녀 집 뒤에는 갑사 김귀성의 집이 있었다. 그런데 김귀성의 집 앞에 어린 여자아이가 두 발이 잘린 채 버려져 있었다. 이제 겨우 네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하는 조그만 아이였다.    다행히 아이는 발이 잘려져 있어도 죽지 않았다. 그 추운 날씨에 발까지 잘려져 버려졌건만, 정신도 말짱했고 그런데다가 총명하기까지 했다. 자신을 발견한 어른들에게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업고 가면 내 발을 자른 집을 알려줄 수 있어요.” 

 

  아이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주운 사람은 김귀성으로, 자신의 부(部), 곧 동사무소에 가서 알렸고, 이것이 다시 한성부를 거쳐 중종에게까지 알려졌다. 중종은 크게 놀랐고, 그 아이를 잘 간호해서 죽지 않게 한 뒤 포도부장을 직접 불러 아이의 발을 자른 범인을 체포하게 했다. 만약 이 사건이 널리 퍼지게 된다면, 범인은 자신의 소행을 숨기기 위해 급히 달아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른의 보호 아래 아이는 자신의 다리가 어떻게 잘렸는지 증언했다. 어떤 어른이 자신의 손목을 묶고, 입에는 솜을 틀어막아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칼로 자신의 발을 자르며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죽어라, 죽어라.” 

 

*****

 

  처음으로 혐의가 두어진 것은 아이가 발견된 곳 근처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노비 한덕이었다. 정월 초에 한덕은 상전의 집을 오가다가, 허리 아래로 동상이 걸리고 부종(浮腫)이 있는 아이가 길에 버려져 있었던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래서 본디 자식이 없던 한덕은 아이를 키울 요량으로 데려왔고, 함께 다듬이질을 하며 밤을 보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주인이 아이를 보고는 하필이면 더러운 아이를 데려왔다고 야단을 쳤기에 다시 길에 버렸다는 것이다.  

 

*****

 

  그렇게 다시 버려진 아이는 이번에는 대궐에서 쫓겨난 수은이라는 자가 거둬갔다. 하지만 또 버림받았고, 이번엔 김별좌의 종 연수가 데려갔다고 했다. 그러나 또다시 버림받은 후 마지막으로 아이를 주워간 것은 용산의 무당인 귀덕이었다. 그리고 발이 잘린 아이가 발견된 곳이 바로 귀덕의 집 뒤였다.

  그러나 정작 아이의 발이 왜 잘렸는지는 알 수 없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결국 한덕-수은-연수의 순서대로 아이를 주워갔다가 버리기를 반복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아이의 신세가 참으로 불쌍하지만, 더욱 가혹한 것은 양 발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아이의 사건이 유명해지자, 이번에는 아이의 생모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한덕과 마찬가지로 사노비였던 중덕이었다. 그녀는 발이 잘린 아이가 자신의 딸이며, 이름이 옥가이라고 했다. 옥가이는 본래 중덕과 아마도 같은 노비였을 남편 사이에서 얻은 아이였는데 지난 해 9월 29일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 이후 내내 찾지 못하고 있다가, 발이 잘린 어린아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중덕과 그 남편이 찾아가 보니 과연 자신들의 딸 옥가이였다는 것이다. 

모녀는 서로를 알아보았던 것일까? 어쩌다가 발이 잘린 것이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옥가이는 자신의 곁에 앉아 죽을 먹여주던 한덕을 가리켰다.


  “저 여자가 내 발을 잘랐어요.” 

 

*****

 

  이런 문제 때문에 신하들과 중종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한덕은 옥가이를 처음 주워왔던 사람이었고, 중덕은 자신이 옥가이의 생모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의 집은 그렇게 멀지 않았는데도 딸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는 것이 납득하기 힘들었고, 정말 생모인지 확인하기도 어려웠다.
  중종이 굳이 발이 잘린 옥가이의 생모를 찾으려고 했던 것은, 낳아준 어머니에게 성심으로 간호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비록 양 발이 잘렸다고는 하지만 치료를 잘 하면 살아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중덕이 생모인지 아닌지를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중종은 처음 발이 잘린 아이를 주워왔던 김귀성의 집에서 옥가이를 잘 간호해서 죽지 않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중종은 옥가이와 한덕, 중덕을 만나게 해서 누가 낳아준 사람이고 누가 길러준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죄인을 알 수 있으리라 보았다. 하지만 어린아이를 감옥에 보낼 수 없는 노릇이니 한덕과 중덕을 아이 있는 곳에 보내어 얼굴을 마주대고 심문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옥가이는 “어미가 내 발을 잘랐다.” 라고 말했다.

 

  과연 그 어미는 누구일까. 주워준 한덕일까, 아니면 낳아준 어미 중덕일까.


  의금부에서 보고하기를, ‘처음에는 아이가 미욱하고 말이 오락가락해서 믿을 수 없겠다’라고 했건만, 나중에는 ‘이제 보니 어리면서도 말에 두서가 있고 앞뒤를 잘 가려 말해 믿을 만하다’고 말했다.

 

*****

 

  한편 중종은 이 사건에 관해 언급하면서, 옥가이가 자신의 발을 자른 사람으로 한덕을 지명했는데, 어린아이가 무슨 나쁜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말할 리가 없으니 한덕이 저지른 짓이 틀림없다고 단정 지었다. 그런 이유로 사건을 엄중하게 살피도록 각별히 명령을 내렸다. 

 

  “신중히 간호하고 의식(衣食)이 모자라지 않게 할 것이며 죽게 하지 말라. 불행히 죽으면 너는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잘려진 두 발은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되더라도, 아이는 죽지 않도록 돌보아졌다. 그런데 누가 아이의 발을 잘랐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고,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옥가이는 자신의 발을 자른 것은 한덕이고, 그때 털모자를 쓴 사람이 곁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아이치고는 분명한 답변이었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 집에서 유일하게 모자 쓴 사람을 아이에게 보였지만 아니라고 대답했다.

  또 옥가이의 생모 중덕은 지난 9월에 아이를 잃었다고 했는데, 한덕은 1월 10일에 옥가이를 주웠다가 하루 만에 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다섯 달 동안 아이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발이 잘리기 직전에는? 한덕과 같이 일하는 노비인 입사리와 봉비도 정월 초에 옥가이를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근처의 주민인 흔비는 정월 보름에 아이를 본 적이 있다고 했고, 옥가이를 마지막으로 주웠던 무녀 귀덕은 27일에 아이를 주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누구도 아이의 발이 잘린 것은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중종은 증인들의 말이 오락가락하고 저마다 조금씩 달라서 진상을 밝혀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는 낭관에게 명령을 내려 한덕은 물론 다른 관련자들에게 모두 모자를 씌우고 옥가이에게 보여 발을 자른 사람이 누구인지를 지적하게 했다. 그 외에도 한덕과 함께 사는 친척들에게도 모두 털모자를 씌워 아이가 보게 했다. 제1용의자는 여전히 한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한덕은 여전히 혐의를 부인했다. 그리고 한 번 주운 옥가이를 다시 버릴 때 용산이 아닌, 거리가 조금 떨어진 청파에 가져다 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옥가이의 발을 자른 것은 그녀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중종은 다시 한 번 한덕에게 옥가이의 발을 잘랐는지의 여부를 물어보게 하고, 한덕 이후 가장 마지막으로 옥가이를 데려갔던 무당 귀덕에게 발이 잘려 있는 아이를 데려간 이유를 물어보았다. 옥가이와 귀덕을 만나게 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게 한 것은 물론이었다. 지의금부사 유보와 동지의금부사 심언경이 옥가이를 데려다놓고, 누가 네 발을 잘랐느냐고 물어보자 옥가이는 몇 번이고 한덕을 가리켰다. 여기까지의 사실로 범인은 한덕이라고 단정 짓고 사건을 완결 지으려고 했다. 

 

*****

 

  그런데 옥가이가 한덕에게 버려진 이후, 두 발이 잘린 채 발견되기 전까지의 행적이 차츰 밝혀지면서 이제까지의 가정이 뒤집히게 된다. 앞서 언급했지만, 한덕에게 버려진 뒤 옥가이를 주워간 것은 수은이었다. 수은은 한덕의 이웃에서 살고 있던 자로, 궁궐에서 쫓겨난 사람이었다.
  수은이 말하기를, 종 영대가 어린 여자아이를 업고 왔는데 두 발이 동상에 걸려 있었고, 지저분해서 가져다 버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행색이 초라한데다 병까지 있으니 데리고 있어봐야 밥만 축낼 것이라면서.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 다음으로 주워간 연수 역시 두 발에 동상이 걸려 검게 부어오른 채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불쌍해서 데려왔지만, 주인이 야단치므로 또다시 버렸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옥가이를 주워간 것은 무녀 귀덕이었다. 그런데 귀덕은 옥가이의 발이 잘라서 떨어진 게 아니라, 동상으로 썩어 떨어졌다고 말했다. 

 

  “정월 27일 어린아이가 두 발이 동상에 걸려 있어 데리고 왔는데, 이달 초5일에 발 하나가 동상으로 빠졌고 초8일에는 또 다른 발이 동상으로 빠졌다.”    

 

  귀덕은 이 말을 증명해줄 증인으로 자질금과 을비를 들었고, 그 두 사람이 아이의 발이 빠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귀덕이 아이를 데려와 살려내는 것은 보았지만, 그때까지는 발이 멀쩡했고 발이 떨어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즉 귀덕과 말이 맞지 않았다.

  어쨌든 귀덕은 옥가이를 마지막으로 주웠고, 마지막으로 버린 사람이었다. 귀덕은 다른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를 주워왔다가, 쓸모없다고 생각해서 돈독이라는 사람을 시켜 버리게 했다. 따라서 중종도 옥가이가 귀덕의 집에서는 발이 잘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

 

  마침내 의금부사들은 한덕이 옥가이의 발을 자른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4~5세의 모자란 아이의 말만 믿고 형추(刑推)하는 것이 사체에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율(律)에도 ‘80세 이후와 10세 이전 사람의 말은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

 

  하지만 중종은 여전히 옥가이의 말을 신뢰했고 사건을 계속 수사하고자 했다. 옥가이가 이제까지 심문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한덕을 범인으로 지목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덕이 아이의 발을 자르고 내버린 뒤, 이것으로 남을 모함하려 했던 게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그러면서 옥가이의 발목 상처가 썩어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칼로 자른 것인지 확인할 것을 명령했다. 

  21일, 의술에 능통한 의원과 한성관의 낭관들은 옥가이의 상처를 살피고 검사한 뒤 의금부를 통해 보고를 올렸다. 옥가이의 발목은 칼로 자른 상처였다. 그 근거로 동상으로 빠진 발이면 복사뼈와 뼈가 남아 있고 살은 썩어도 힘줄은 멀쩡한데, 옥가이의 상처는 그렇지 않았다고 고했다. 또 정강이뼈가 부러진 곳이 오래되고 새살이 나고 살가죽이 줄어들었으니 칼로 자른 상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의견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판의금부사 김금사 등이 바로 그런 예였다. 그는 처음에는 옥가이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동상으로 발이 빠졌다고 말한 귀덕을 매질하고 심문을 했다. 그러나 근래 유물금이라는 사람이 동상으로 발이 빠진 것을 보았는데 칼로 자른 것과 비슷하다며 옥가이의 발도 그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젖먹이 어린아이의 말로 한덕을 추문하는 일이 사리에 어떻겠습니까? 가령 그 발이 동상에 걸려 귀덕의 집에서 빠졌다 해도 치료하지 못해서 발이 빠지게 되었다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제 형추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결죄(決罪)를 해야 하는데 무슨 말로 조서(調書)를 작성해야 합니까. 의원의 말에만 의거하여 귀덕을 계속 심문하는 것이 사리에 어떻겠습니까?” 

 

*****

 

  실록을 보면 중종은 옥가이의 말을 온전히 믿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중종은 동상으로 발이 빠졌으면 옥가이의 정강이뼈가 왜 끊어졌으며, 옥가이가 전혀 없는 일을 꾸며내었다면 자신의 발이 잘릴 때 어른들이 입을 틀어막았다는 말을 어떻게 했겠느냐고 반박했다. 

 

*****

 

  그달 22일, 중종은 버려진 아이를 돌보는 방안, 요즘 말로 하자면 아동복지법을 발안하는 와중에 발이 잘린 아이의 사건을 언급했다.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 중에 가장 먼저 할 일로 이 같은 어린아이를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없다.”

 

  그리고 옥가이에게는 먹을 것을 내렸고, 친어머니로 밝혀진 중덕에게 옥가이를 보내어 잘 보살피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로부터 엿새 뒤인 28일에는 조선왕조 초유의 미아를 보호하는 법률을 제정하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가 길을 잃어버리면, 돌보면서 부모를 찾아주기는커녕 산으로 유인해서 죽이거나, 아니면 몰래 숨겨서 길러 자기 집 노비로 삼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중종이 이런 명령을 내린 것에는 인도주의라는 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라의 지탱을 위해서라도 고아를 보호하려 한 것이리라. 억지로 노비가 되어버린 고아들은 본디 양인이었어도 노비이자 개인의 재산이 되어버렸고, 이는 나라에서 정한 신분제도가 어그러지는 결과였다. 중종은 앞으로 부모 잃은 아이가 발견된다면 즉시 해당 부에 고하게 했다. 또한 이를 지키지 않는다면 당사자와 관령들을 모두 중하게 다스리겠다며, 이와 관련한 절목을 만들어 널리 알리게 했다. 

  하지만 끝내 옥가이의 발이 과연 잘린 것인지, 혹은 동상으로 떨어진 것인지, 그리고 만약 자른 것이라면 누가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밝혀지지 않은 채 종결되었다. 신하들은 더 이상 이 사건으로 나라 안이 들썩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왕에게 이 사건에서 손을 뗄 것을 종용했다.

  2월 30일, 중종과 정승들의 논의는 며칠간 조정을 들썩이게 했던 아이의 발 절단사건을 끝내려는 신하들의 압력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시작은 당시 영의정 정광필이었다. 

 

  “미욱한 아이의 말만 듣고 큰 옥사를 만드는 것은 부당한 듯합니다. …의심스러운 옥사(獄事)이니 끝까지 밝혀내지 않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한편 우의정 장순손은 자신의 발을 잘라낸 정황을 설명했던 옥가이의 말을 보면 꾸며낸 말은 아니라고 봤다. 하지만 옥가이가 동상에 걸린 것도 사실이기에 누가 자른 게 아니라 저절로 빠진 것일 수도 있다고 봤다.

 

  “이런 의심스러운 옥사는 끝까지 추문하더라도 실정을 알지 못할 것이요, 오히려 무고하게 죽을 폐단까지 있습니다. 더구나 동상에 걸려 발이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같은 날, 중종은 옥가이 사건의 마지막 용의자였던 귀덕을 더 이상 추궁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