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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수는 은산 관아의 행랑에서 태어났다. 아비와 어미가 모두 노비였으므로, 정명수는 극천極賤이었다. 노비가 왜 자식을 낳는 것인지 정명수는 알 수 없었다. 아비와 함께 묶여서 아전이 때리는 매를 맞고, 어미와 함께 얼어서 부둥켜안고 잠드는 날이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아홉 살에 얼어 죽은 여동생을 제 손으로 묻으면서 열두 살 난 정명수는 울지 않았다. 언 땅을 파고 관도 없는 시체를 내려놓으면서 정명수는 누이의 목숨이 더 이상 춥거나 주리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안도했다. 그리고 더 이상 춥거나 주리지 않고 다만 흙과 더불어 얼고 녹는 목숨의 끝장이 무서웠다. 정명수의 어미는 해산 뒤끝이 덧나서 밑으로 고름을 쏟고 죽었다. 정명수의 아비는 동헌 객사를 지을 때 통나무를 나르다가 비탈에서 미끄러지는 소달구지에 치어 죽었다. 정명수는 누이의 죽음과 어미 아비의 죽음에 편안했고, 죽음으로써 혈육의 관계에서 놓여나는 끝장이 홀가분했다. 목숨을 점지하되 혈육의 관계를 맺지 않는 새나 짐승이 정명수는 부러웠다. 혈육 없는 세상은 짐을 벗어 놓은 듯 가벼웠다. 어미를 묻고, 그 어미의 밑에서 나온 어린 누이를 묻을 때 정명수는 이제 죽지 말아야 한다며 이를 악물었다. 살아 있는 동안의 추위가 죽어서 흙과 더불어 얼고 녹는 추위보다 견딜 만할 것 같았다. 죽지 말아야 한다는 복받침과 닥쳐올 날들의 캄캄한 어둠이 정명수의 마음속에 포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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