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부원군 정인지는 어릴 적에 엄친을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았는데 글재주가 탁월하였고 용모는 옥 같았다. 늘 외사에 거처하면서 밤늦도록 책을 읽었다. 담장을 사이에 둔 집에는 처자가 있었는데 용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웠고, 그 집안은 대대로 이어온 명문거족이었다. 그 처자가 틈을 통해 미소년이 낭랑한 목소리로 소리 내어 책 읽는 것을 엿보고는 마음속으로 사모하여 밤에 담장을 넘어와 가까이 다가오고자 하는 것이었다. 정인지가 정색을 하고 거절하는데 처자가 소리를 질러 드러내려 하자 그는 거절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따뜻한 말로 달래었다. "그대는 양반 집안 딸이며 나도 아직 장가들지 않았소. 집이 가난하고 모친께서 홀로 계시므로 중매를 놓아도 응하는 자가 없었으니 비록 장가든다 하여도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