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향해 던져라, 달에라도 떨어질테니
블로그 애서(愛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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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야담 75

어우야담 3 / (153) 정인지의 거절

하동부원군 정인지는 어릴 적에 엄친을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았는데 글재주가 탁월하였고 용모는 옥 같았다. 늘 외사에 거처하면서 밤늦도록 책을 읽었다. 담장을 사이에 둔 집에는 처자가 있었는데 용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웠고, 그 집안은 대대로 이어온 명문거족이었다. 그 처자가 틈을 통해 미소년이 낭랑한 목소리로 소리 내어 책 읽는 것을 엿보고는 마음속으로 사모하여 밤에 담장을 넘어와 가까이 다가오고자 하는 것이었다. 정인지가 정색을 하고 거절하는데 처자가 소리를 질러 드러내려 하자 그는 거절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따뜻한 말로 달래었다. "그대는 양반 집안 딸이며 나도 아직 장가들지 않았소. 집이 가난하고 모친께서 홀로 계시므로 중매를 놓아도 응하는 자가 없었으니 비록 장가든다 하여도 당..

어우야담 3 / (151) 부정한 중을 살해한 강자신

어떤 한 서생이 산사에 들어가 공부하였는데 세월이 쌓이니 절의 중과 서로 가깝게 되었다. 중은 매일 아침 사발밥과 향로로 부처에게 봉양한 뒤 겸하여 승지부인의 영혼도 청하는 것이었다. 서생이 그 연고를 물었으나 중은 대답하지 않았다. 훗날 또 이전처럼 영혼 청하는 소리를 듣고 다시 물으니 중은 서생과 이미 친밀한 사이가 되었으므로 그 연유를 다 말해 주었다. "애초부터 모 승지와는 서로 아는 사이였지요. 그를 뵙고자 하여 찾아갔는데 승지는 마침 그날 의금부의 당직이어서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날이 저물어 문밖 곁방에서 묵게 되었지요. 때는 여름 달이 대낮처럼 밝았는데,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지요. 협문이 모두 닫혀 있지 않은 채 여러 계집종들이 서로 뒤엉켜 잠자고 있었고, 침상 위에는..

어우야담 3 / (129) 최운우 가족의 구사일생

만력 연간에 관인 최운우라는 자가 강릉에 살았는데 늦봄에 꽃과 버들이 아름답고 바람과 볕이 화창했으므로 온 집안 사람들이 양양의 우암도에서 놀았다. 장막을 펼치고 술잔과 음식 그릇을 나열하고 생황과 노래를 함께 연주하였다. 술기운이 약간 오르자 그 흥취를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바다에 배를 띄우고 섬 아래를 빙 돌았다. 섬은 기암괴석들이 뒤섞여 맞서 있었고 낚싯줄은 바람에 날리는데 금빛 모래, 은빛 자갈이 천 길의 밑바닥까지 맑게 들여다보여 즐거웠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홀연 일진광풍이 물밑부터 솟아 일어나 무섭게 밀려오는 큰 물결이 하늘까지 닿고 돛대와 노가 기우니 배 가득 탔던 사람들이 모두 풍이굴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최씨의 한 아들만이 홀로 섬 위에 남아 있었으니 기운이 편치 않아 함께 배를 타..

어우야담 3 / (127) 황인의 의지

황인은 판서 황림의 형이다. 시험장에서 논책을 잘 지었는데 끝내는 중서로 억울한 죄를 입었다. 양주에 일이 있어 뜰에 작은 정자를 짓고 손수 잣나무를 심었는데 그때 나이 54세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저지하며 말하였다. "잣나무는 느리게 성장하니 수십 년 가지고는 안 되는데 연로하신 나이에 손수 심으시다뇨." 황인이 말했다. "타사는 절구를 갈았고, 우공은 산을 옮겼으니, 모두 늙어서도 뜻을 바꾸지 않았지요. 사람 일이란 기필하기 어렵소. 그러니 늙었다고 해서 스스로 그만두는 것은 옳지 않소. 게다가 나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여도 훗날 내 자손을 위한 계책은 될 것이니 나쁜 일은 아니오." 80세에 죽었는데, 잣나무의 크기가 이미 아름드리로 가을이면 열매를 먹기 시작한 지가 몇 년 되었다. 지금 사람들은..

어우야담 3 / (106) 장수하는 방법들

옛날에 특별히 오래 사는 사례가 셋 있었으니, 하나는 추한 아내에게 장가든 경우요, 또 하나는 먹는 양을 조절하여 먹는 것이요, 마지막 하나는 밤에 잘 때 머리를 덮지 않는 것이다. 비단 남자만이 색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요, 용모가 아리따운 여자 또한 틀림없이 두 배는 음탕하리니, 몸을 건강하게 하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아름다운 여자를 멀리해야 한다. 그러므로 양생서에서 "상사는 방을 따로 쓰고, 중사는 침상을 따로 쓰며, 하사는 자리를 따로 쓴다."고 말하였으니, 옛사람들 또한 이를 경계하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근세에 송찬은 한평생 누린 나이가 90세였는데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다. 중년 이후로는 밤에는 그 길이가 다리를 넘는 잠옷을 입고 조각 직물로 잠방이를 만들어 아래를 싸고 잤다. 먹는 바도 정한 ..

어우야담 3 / (94) 탐식가의 오식

서울에 한 탐식가가 있었다. 일이 있어 남양 개펄에 갔는데 남양에는 굴 조개젓이 많다고 본디 들었으므로 그것을 맛보고자 마음먹었다. 그런데 마침 주인집의 죽통에 굴 조개젓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은 가지와 먹는 것이 제격이라고 여겨 가지를 찾아 보았으나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다 처마 밑에 가지 반절이 있는 것을 보았다. 탐식가는 죽통의 굴 조개젓을 가져다 가지에 얹어 먹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기침과 천식이 심한 주인집 노인이 한참 기침을 하다가 가래를 뱉으려고 죽통을 찾으니 없는 것이었다. 또 아이가 설사를 앓다가 항문이 빠져 그 모친이 가지를 반으로 잘라 그것으로 항문을 밀어 넣곤 했는데, 이때 그 가지를 찾았으나 간 곳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식탐 많은 객은 노인의 가래를 굴 조개..

어우야담 3 / (92) 대식가들

찬성 정응두는 먹는 양이 가장 컸다. 일찍이 농장에서 한가하게 있는데 촌노인이 홍시 2백 개 담은 큰 고리와 술 두 병 및 여러 안주를 찬성에게 올리는 것이었다. 찬성은 술 두 병과 안주를 다 먹어 그릇을 비우고는 앉아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홍시를 집어 꼭지를 따 입에다 던져 넣어 잠깐 사이에 다 비우고 빈 고리를 촌 노인에게 던져 주는 것이었다. 노인이 절하며 사죄하였다. "제가 애초 이것을 올릴 때에는 여러 날 드실 거리를 바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저를 대한 채 다 드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죠." 그 마을에 이충위라는 자가 있었는데 집안에 사철 제사가 있어 제사가 끝나면 찬성을 맞이하여 먹이면서 한 신위에게 진설한 것을 모두 찬성에게 들였다. 제기는 몹시 커서 주연 때 사용하는 그릇..

어우야담 3 / (69) 죽고 사는 것은 운명

홍서봉의 집은 영경전 앞에 있다. 손님 맞이에 잡으려고 큰 소 한 마리를 사 놓고 백정이 아직 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노비 수손이 과천에서 땔나무를 싣고 와 소를 말뚝에 매에 놨는데 소위 등이 가로질러 놓은 나무에 찔려 척추가 부러져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잡으려고 사 놓은 소와 크기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 소를 저 소와 바꾸라고 명하였으니, 땔나무를 싣고 온 소가 마침내 소반 음식으로 들어갔고 도살하려 했던 소는 살아 과천으로 가게 되었다. 우리 집에는 두 마리의 수탉이 있었다. 그중 검은 놈이 암탉을 깔고 닭장을 전횡하여 늘 붉은 수탉을 쫓아내니 붉은 수탉은 닭장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웃집에 의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인에게 그 붉은 수탉을 잡으라 하였는데 잘못 알아듣고는 검은 수탉..

어우야담 3 / (62) 조카 집을 탕진한 여승 안씨 귀신

낙산 아래 소용동에 과부 안씨가 있었는데 집안에서 염불하며 채식만 하고 늘 흰 중 옷을 입고 짚으로 짠 둥근 갓을 쓰고 살다가 60세가 넘어서 죽었다. 자녀는 없었으므로 조카가 그 집에서 살았다. 몇 년 지나자 마루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 조카가 나가 보니 안씨가 흰 중 옷을 입고 짚으로 짠 둥근 갓을 쓰고 환한 대낮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온 집안 사람들이 황송해하며 차례로 줄 서 절을 올리니 안씨가 배고프다며 음식을 청하였다. 그 집에서 성찬을 차려 올리니 그릇 가득한 음식들을 잠깐 사이에 다 비우고 또 달라고 구하기에 다시 차려서 먹였다. 한 달 남짓이같이 하였다. 하루는 바야흐로 봄철이어서 산 가득한 두견화가 진실로 아름다웠는데,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싶다 하였다. 그 집에서는 기름을 사서 전..

어우야담 3 / (61) 이경희에게 붙은 귀신 - 물괴 -

이른바 물괴라는 것은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사물이 오래되면 신령해져서 그 형체를 변하여 장난하는 것일 뿐이다. 천지간에 사대-불가에서 말하는, 세상의 만물을 이루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네가지-의 기운이 모이면 사람이 되었다가, 죽으면 태공으로 돌아가 막연하게 흩어지는데, 그 사이에 원한을 품음이 생겨 기가 흩어지지 않고서 인간에게 요괴를 부리는 것이다. 천백 가운데 한둘이 그렇다. 다만 사물이 오래되면 영기를 머금고 형상을 빌려 곤충, 초목, 물고기, 자라의 정령과 더불어 능히 기를 내어 허상이 되는 것이 빈번히 있다. 그 기운은 사악한 데서 근본하고 본디 바른 것에는 간섭하지 않으니 이른바 사악함이 바른 것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찌 헛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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