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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보따리 - 책/데미안

데미안 / 두 세계 / 헤르만 헤세 / 타인

돈달원 2020. 12. 2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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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에서 라틴어 학교를 다니던 열 살 때의 경험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때의 추억들이 진하게 밀려들어 와 가슴을 파고들며 슬픔과 즐거운 전율로 마음을 뒤흔든다. 어두컴컴한 골목들과 환한 건물, 교회 탑들과 시계 소리, 사람들의 얼굴과 아늑하고 따뜻한 방, 비밀에 둘러싸여 유령이 나올 것 같은 공포로 가득한 방들, 따뜻하고 비좁은 방과 토끼와 하녀들의 냄새, 집에서 약 달이는 냄새와 말린 과일 향이 난다. 그곳엔 두 세계가 얽혀 있었고, 밤과 낮이 세계의 양쪽 끝에서부터 나왔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비좁아서 안에는 부모님밖에는 살지 않았다.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이름의 세계는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라는 이름의 세계이기도 했다. 이 세계에 속하는 것은 부드러운 광채, 청명함과 깨끗함이었다. 여기에는 부드럽고 친절한 이야기들, 깨끗이 씻은 손, 깔끔한 옷, 좋은 예의범절이 깃들어 있었다. 아침에는 찬송가가 불렸고,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렸다. 이 세계에는 곧바로 미래로 통하는 곧은길이 있었고, 의무와 책임, 양심의 가책과 고해, 용서와 좋은 목적들, 사랑 그리고 존경, 성경 말씀과 지혜가 있었다. 인생이 맑고 명확하고 아름답고 정돈되어 있으려면 이 세계를 향해야만 했다.
  한편 또 다른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복판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냄새도 달랐고, 말투도 달랐고,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이 두 번째 세계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속했고, 유령 이야기와 추한 소문이 있었다. 그곳에는 섬뜩하고 요사스럽고 끔찍한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넘쳤고, 도살장과 감옥, 주정뱅이들과 고함치는 여자들, 새끼 낳는 암소, 쓰러진 말들, 강도,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아름답고도 무서운, 거칠고 잔인한 이러한 모든 일이 바로 내 주위에, 옆 골목에, 이웃집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경찰과 불량배들이 거리를 돌아다녔고, 주정뱅이들이 아내를 팼고, 저녁이면 젊은 여자들이 공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늙은 여인들은 주술을 걸어 누군가를 병이 나게 할 수 있었고, 숲에는 도둑들이 살았고, 방화범들이 경찰에게 잡히기도 했다.
  어디서나 이 격렬한 두 번째 세계가 넘쳐 나고 악취를 풍겼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던 우리 집만을 빼고는. 이것은 참으로 좋았다. 우리 집에 평화와 질서와 안정, 의무와 책임, 용서와 사랑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 많은 다른 것들, 소란스럽고 요란한 것, 어둡고 폭력적인 것이 가득한 곳에서 한걸음에 어머니 품으로 도망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두 세계의 경계가 가깝게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가 얼마나 가까운지! 예를 들면 우리 집 가정부 리나는 저녁 예배를 드릴 때 거실 문가에 앉아 깨끗하게 씻은 두 손을 다림질 된 앞치마 위에 올려놓고 맑은 목소리로 같이 찬송가를 불렀는데, 그럴 때 리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우리들의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했다. 하지만 부엌이나 장작을 쌓아 둔 광에서 머리 없는 난쟁이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거나 작은 푸줏간에서 이웃집 여인들과 싸울 땐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 버리고 다른 세계에 속했다. 비밀에 둘러싸여 있었다. 모든 일이 그랬다. 내 자신이 가장 그러했다.
  분명 나는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했고 내 부모님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내 눈과 귀가 향하는 곳 어디에나 다른 세계가 있었다. 나는 다른 세계 속에서도 살고 있었다. 비록 그런 것들이 내게 낯설고 무서운 일이라 해도, 그래서 그곳에서 양심의 가책과 불안함이 있었다 하더라도, 내가 한동안 가장 살고 싶어 한 곳은 금지된 세계였다. 그리고 밝은 세계로의 귀환은-그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옳은 것임에도-더 아름답지 않은 것, 더 지루한 것, 더 무미건조한 세계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물론 내 인생의 목표가 우리 부모님처럼 밝고 맑고 훌륭하고 절도 있게 되는 것임을 잘 의식하고 있었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길은 너무 멀었다. 거기까지 이르자면 학교를 견디고, 대학 공부를 하고, 온갖 시험들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그 길은 또 다른 어두운 세계의 옆이나 한가운데로 이어져 있어서, 어두운 세계에 머무르거나 어쩌면 그 안으로 빠져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둠의 세계로 빠져 버린 방탕아들이 아버지에게로, 선한 것의 품으로 돌아온다면 그 귀환은 언제나 구원받을 수 있는 위대한 일이었다. 나는 그것만이 옳고 바람직하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악당들과 방탕아들에 관한 대목이 나를 더 사로잡았다. 솔직히 말하면 어떤 때는 방탕아가 참회를 하고 다시 밝은 생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그야말로 불만스럽게 여겨졌다. 악마를 상상할 때도, 변장을 하고 있든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든지 간에 언제나 저 아래 길거리나 시장, 혹은 술집에 있으리라 생각했을 뿐이지 우리 집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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