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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보따리 - 책/어우야담

어우야담 / (304) 믿을 수 없는 사서

돈달원 2021. 3. 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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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왕씨로 왕위를 이었던 자들은 모두 왼쪽 겨드랑이 아래에 금색 비늘 세 개가 있었다. 신우辛禑는 강화江華에서 죽었고 신창辛昌은 강릉江陵에서 죽었는데 모두 이러한 표식이 있었다. 차식車軾이 고성高城 군수가 되었을 때 양사언楊士彦의 장인 이시춘李時春을 뵈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70여 세였다. 이시춘은 매일 말하였다.

 

  "나의 증조모께서 강릉에 거처하셨는데 나이 90여 세였을 때 말씀하시기를, '내가 12세에 그곳에서 전조의 왕이 처형당한다는 말을 듣고 가서 보니 처형에 임박하여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왕씨는 본래 용의 자손으로 왼쪽 겨드랑이 아래에 반드시 금색 비늘이 있었으니 세상에서는 그것을 표식으로 삼았다고 하면서 마침내 옷을 벗어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는데, 겨드랑이 아래에 과연 엽전 크기만 한 세 개의 금색 비늘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비통해하였었지'라고 하셨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공민왕은 후사가 없었고 서울에서 연소한 남자들을 선발하여 도령都令이라고 호칭하여 궁중에 거처시켰으며, 왕비와 신돈辛旽이 정을 통하여 두 아들을 낳았으므로 우禑와 창昌은 왕씨가 아니었던 까닭에 역사서에서는 신우辛禑, 신창辛昌이라고 쓰고 있다고 한다. 이제 강릉 사람들이 세 개의 비늘을 목도한 것으로 징험하건대 사관이 속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다. 어떤 사람은, 권근과 정도전이 우리 조선에 아첨하느라 후세에게 거짓과 참을 어지럽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또 차원부車原頫의 영원기靈寃記를 살피건대, 신숙주와 성삼문이 왕의 가르침을 받들고 붙인 주註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김부식은 간교하고 사악하여 사사로운 원한을 가지고 역사를 지어 정지상의 충정忠貞을 더럽혔다."

 

  고려의 역사를 보면 정지상 무리가 악하고 간흉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러 책에 한두 번 쓰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필史筆이 모두 김부식에게서 나왔으니 그가 속이지 않았다고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역사를 믿을 수 없음이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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