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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기담 / 3일 동안 2,500가구 전소, 불타는 한성 (feat. 세종)

돈달원 2021. 4. 28.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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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 8년 2월, 유난히 그해의 겨울은 건조했다. 눈은커녕 진눈깨비도 내리지 않았고, 더욱이 바람마저 세게 불었다. 이런 날씨를 틈타 불을 지르는 방화범들이 기승을 부렸고, 불을 끄느라 혼란스러운 와중에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2월 12일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방화가 벌어지는 세태가 언급되고 있으며, 이에 불을 지르는 사람을 신고하는 것을 강화하고, 상금을 지급하는 방안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서울 곳곳의 관리들과 주민들로 하여금 방범대를 조직해서 방화범들을 잡게 하는 민방위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 뒤 엄청난 재앙이 벌어지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해 2월 15일, 한성의 남쪽인 인순부의 종 장룡의 집에서 불이 났다. 방화범의 소행인지, 누군가의 실수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진화가 지체된 사이, 때마침 불어온 거센 서북풍 덕분에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맹렬하게 타올랐고, 서울의 서쪽 및 북쪽의 행랑 106간과 중부의 인가 1,630호, 남부의 350호, 동부의 190호가 불타버렸다. 당시 서울, 곧 한성은 동, 서, 남, 북, 중의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 5부제였다. 그러니까 거의 서울의 전 지역이 화마의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이 화재로 죽은 사람은 남자 9명, 여자 23명이었다. 행랑을 제외하고 무려 2,000채가 넘는 집이 불탔던 것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적은 인명피해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는 어린아이나 노인들,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불에 휘말려 재가 되어버린 사람의 숫자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직접적인 인명피해 외에도 화상으로 다친 사람들은 훨씬 많았을 것이고, 화재의 북새통에 가족들끼리 잃어버리고 헤어진 숫자는 더욱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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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은 도성을 벗어나 군사들의 무술 훈련을 시행하고 독려하는 강무(講武)에 나가 있었던 것이다. 장소는 강원도 횡성이었으니 꽤 먼 길을 떠난 참이었으며, 상당수의 신하들도 왕을 따라 도성을 비운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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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성을 떠나 있던 세종에게도 한발 늦게 화재의 소식이 급히 전해졌다. 세종은 화재 하루 전날 지평의 지덕원 냇가에서 머물렀다가 다시 횡성을 향해 길을 떠나려던 참에, 서울에서 파견된 녹사(錄事) 고상충으로부터 화재 소식을 보고받았다. 뜻밖에 벌어진 엄청난 재해 앞에서 세종은 크게 놀라는 한편 당황했다. 본래 그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참을성이 강한 성격이었지만, 너무도 갑작스러운 참혹한 재난 탓이었는지 그로선 드물게 신하들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이번은 내가 오고 싶지 않은 것을 경들이 가자고 청했고, 어제도 바람이 심하게 불고 몸이 불편하여 나는 궁에 돌아가고 싶었는데 경들이 청하여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이번 일이 천심(天心)에 맞지 않아 재난이 벌어진 것으로 알고 깊이 후회한다. 내일은 궁궐로 돌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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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은 급히 도성으로 돌아왔는데, 급한 마음은 돌아오는 와중에도 여실하게 드러났다. 왕이 환궁할 때 치러야 하는 예식을 생략하게 하고, 관리들이 나와 마중하는 것도 간소하게 했으며 곧장 한성으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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