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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보따리 - 책/삼국유사

삼국유사 / 감통 제 7 / 월명사의 도솔가

돈달원 2020. 11. 1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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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덕왕 19년 경자년(760년) 4월 초하루에 두 해가 나란히 나타나 열흘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천문을 맡은 관리가 아뢰었다.

 

  "인연 있는 승려를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하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원전(朝元殿)에다 깨끗이 단을 만들고 청양루(靑陽樓)에 행차하여 인연 있는 승려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월명사(月明師)가 밭 사이로 난 남쪽 길을 가고 있었는데, 왕이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 단을 열고 기도하는 글을 짓게 했다. 월명사가 말했다.

 

  "신승은 국선의 무리에 속하여 단지 향기만을 알 뿐 범성(梵聲)은 익숙하지 못합니다."

 

  왕이 말했다.

 

  "이미 인연 있는 승려로 지목되었으니, 향가를 지어도 좋소."

 

  이에 월명사가 [도솔가]를 지어 불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 여기에 산화가를 부를제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받들어

    미륵좌주(彌勒座主)를 모셔라.

 

  그 시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용루(龍樓)에서 오늘 산화가를 불러

    푸른 구름에 한 송이 꽃을 날려 보낸다.

    은근하고 곧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니

    도솔천의 대선가(大仙家)를 멀리서 맞이하리.

 

  지금 세속에서는 이 시를 가리켜 [산화가]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니 마땅히 [도솔가]라고 해야 한다. 이와 별도로 [산화가]가 있으나, 글이 번잡하여 싣지 않는다.

  얼마 후 해의 괴이함이 곧 사라졌다. 왕은 이것을 기려 좋은 차 한 봉지와 수정염주 108개를 내려 주었다. 이때 갑자기

모습이 말쑥한 동자가 나타나 공손히 꿇어앉아 차와 염주를 받들어 궁전 서쪽의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은 그를 안 대궐의 심부름꾼으로 여겼고, 왕은 법사의 시종이라고 여겼는데, 확인해 보니 모두 잘못된 생각이었다. 왕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뒤쫓게 하니, 동자는 내원(內院)의 탑 안으로 사라졌고, 차와 염주는 남쪽 벽에 그려진 미륵상 앞에 있었다. 이에 월명의 지극한 덕과 정성이 이처럼 부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조정에서나 민간에서나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왕은 월명사를 더욱 존경하여 다시 비단 백 필을 주어 큰 정성을 기렸다.

  월명사는 또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재를 올리면서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내는데, 문득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종이돈을 날려 서쪽으로 사라지게 했다.

  그 향가는 다음과 같다.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 있으니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어찌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나

    도를 닦으며 기다리련다.

 

  월명은 언제나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살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일찍이 달밤에 피리를 불며 문 앞의 큰길을 지나가자, 달이 그를 위해서 운행을 멈추었다. 이 때문에 이 길을 월명리(月明里)라 하였으며 월명사 또한 이 일로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 

  월명사는 바로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다. 신라 사람들은 향가를 숭상한 지 오래되었는데, 대개 시가와 송가(頌歌)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바람이 종이 돈을 날려 저승 가는 누이의 노자를 삼게 했고,

    피리 소리는 밝은 달을 움직여 항아(嫦娥)를 머무르게 했네.

    도솔천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마라.

    만덕화(萬德花) 한 곡조로 즐겨 맞이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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