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懶翁은 고려 말의 신승神僧이다. 회암사檜岩寺의 주지가 되어 부임하려고 할 때, 회암사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 납의를 입고 약립篛笠을 쓴 어떤 사람이 길 왼편에 엎드려 알현하였다. 나옹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빈도貧道는 절에서 밥을 빌어먹고 있는 중입니다. 대사께서 저희 절에 왕림하신다는 말을 듣고 감히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옹은 그 중으로 하여금 앞장서도록 하였는데, 그는 물을 건너면서도 하의를 걷지 않고 마치 평지 걷듯 하는지라 나옹은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윽고 알게 되었다. 절 문을 들어서자 그 중은 간 곳이 없었다.
나옹이 절에 들어서서 예불도 하지 않고 곧장 사랑각舍廊閣으로 가니 절 중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잠시 후 나옹은 절의 중들에게 먼저 한 아름 되게 모아 놓은 큰 삼끈을 수십 길 갖추라고 명령하니 모든 중들이 더욱 이상하게 여겨 말했다.
"대사께서 처음 임하시자마자 예불도 드리지 않고 먼저 물건을 모으는 데 힘쓰시니 무슨 까닭인가?"
그러나 감히 나옹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명령한 대로 갖추어 올렸다.
나옹은 대불전大佛殿에 올라 건장한 중을 1백 명 뽑더니 큰 삼끈을 가지고 제 몇 번째 앉아 있는 장륙불丈六佛의 몸체를 묶어 그것을 바닥에 넘어뜨리라고 지시하였다. 절 안에 있던 노승들이 모두 모여 합장하며 간청하였다.
"전부터 이 부처님의 영험함은 특별하였사옵니다. 비 내리기를 기도하면 비를 내리고 병 낫기를 기도하면 병을 낫게 했으며 아들 낳기를 기도하면 잉태시켜 기도하는 바대로 곧 응험을 내렸사옵니다. 대사님이 처음 이 절을 다스림에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눈을 씻고 바라보는데, 대대로 존경해 온 불상부터 먼저 쓰러뜨리시다니 무척 괴이하옵니다."
나옹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모든 중들이 감히 그를 거역하지 못하고 힘을 합하여 불상을 끌어냈다. 목상木象에다 금을 입힌 것이라 무거운 물체가 아니었는데도 온갖 방법을 다 써 끌어당겼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 노승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사람들의 말마따나 신령한 부처님을 모욕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큰 화가 닥칠 것입니다."
나옹이 탑상榻上에서 한 손으로 그 불상을 끌어당기니 즉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 절문 앞에 땔나무를 쌓고 불을 지르니 노린내가 산에 가득하였다. 그리고는 다른 불상을 개조하여 세웠는데 또다시 요환妖幻이 있자 전처럼 해서 불태워 버렸다. 세 번째 새로 만들어 세우니 다시 재앙이 없었다. 나옹은 불상을 안치하며 말했다.
"무릇 불상을 안치하고 향화를 피워 제사 지낼 때 간혹 산 귀신이나 나무 귀신이 불상에 붙어서 거짓으로 여래如來의 환술을 짓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른바 아무 절에 아무 불상이 있는데 예불을 올리면 그때마다 감응이 있다고 하는 것들은 모두 다 이러한 유인 것이다. 어리석은 중들은 그것을 받들어 모시지만 간혹 심지어는 절 전체가 화를 입어 중들이 무고하게 죽는 일까지도 발생하니 이는 가히 두려워할 만하지 않겠느냐."
아아! 나옹은 신통한 고승이로다. 대개 물건이 오래되면 신령해지고 신령해지면 반드시 의지하는 데가 있는 법이다. 하물며 불사佛寺는 아침저녁으로 공양하는 곳이니 음식을 구하는 귀신들이 이를 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또한 요즘 사람들은 무덤 위에 혹 돌사람을 깎아 놓아 그로써 신도神道를 호위하는데 세월이 오래 지나면 산 귀신이 그곳에 들어 그 제사를 대신받기도 한다. 근래에는 간혹 돌로 된 화표로 돌사람을 대신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못 이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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